시험 당일 제가 수험장 출입구 바로 앞에 배정을 받았습니다. 리스닝 시작되고 13번 문제 답 체크를 하는데, 앞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감독관인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잠깐 앞을 봤는데, 감독관이 아니라 한 남자 수험생이더군요. 한 손으로는 헬로키티 여행용 티슈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모든 악력을 다해 쥐고 있는 듯 했습니다. 와이프에게 공감 능력 제로라고 매번 타박만 당하던 제가 갑자기 무슨 능력이 생겼는지 순간적으로 그 친구에게 이입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시험 시작 전 화장실을 다녀올 시간이 충분 했을 것인데,,, 겨우 13번 문제에서 리스닝을 포기하고 나갈 수 밖에 없는 그에게 순간적인 측인지심이 발동하였습니다. '토익이 처음이라 긴장을 했나? 얼마나 긴장을 했으면...'. 안타까움과 동시에 총총 걸음으로 고사장을 빠져 나가는 그 친구의 둔부가 저의 얼굴 앞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실소와 함께 멘탈의 붕괴가 시작 되었습니다. 허걱 멘붕의 조짐을 자각하자 심장이 급속도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다잡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귀를 기울이는 순간.. 아뿔싸 호주 억양의 남자가 주저리 주저리 떠들더군요. 해외영업팀에서 인도시장을 담당하며 실력을 다져온 저도 유독 호주 악센트는 익숙치가 않은데, 그렇게 멘탈은 후쿠시마 원자로처럼 흘러 내렸고 답을 찍는 상황까지 갔습니다. 리스닝 만점이 목표였는데... 별별 생각이 스쳐지나가더군요. 헬로키티 휴지를 들고 화장실로 간 그 청년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리스닝이 어떻게 지나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다시 마음을 가다듬도 리딩으로 넘어갔죠. 중반을 넘어서자 이때 2차 위기가 옵니다. 그 아이가 돌아온 것입니다. 한 손에 꼭 쥐고 갔던 헬로키티 휴지는 없더군요. 부담감을 내려 놓은 듯 표정이 편해 보였습니다. 조신하게 짐을 챙기더니 예의바르게 감독관에게 목례한 후 교실을 나갔습니다. 왜 제가 굳이 떠나는 그 녀석의 응시료를 걱정했을까요? 1초 안팍의 짧은 시간동안 저의 2차 멘붕은 끝났고 리딩의 이메일 지문을 2번이나 읽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남은 시간은 촉박하고 마치 난독증 환자처럼 알파벳이 뒤섞이는 듯한 혼돈의 카오스를 지나고 다시 정신 차려보니 종료시간에 맞춰 모든 문제풀이를 마무리 했습니다.

시험을 마치고 고사장 운동장에 주차해 놨던 차에 타자마자 쌍욕의 쌍욕을 했네요. 결국 만점 목표의 꿈은 그렇게 포기하고 800점대까지 예상해서 재시험 고민했는데 다행히 900점 턱걸이해서 그나마 재시험 필요는 없게 되었습니다. 살다 살다 토익시험 보다 응가하러 가는 사람 때문에 영향을 받을 줄 꿈에도 생각 못했네요.